Letter from Matter_02, 2023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좋아한다. 근래 본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 영화는 검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낮게 울리는 거대한 노이즈만 어둠을 채운다. 극장의 어둠과 영화의 어둠이 구분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관객은 자기가 언제 문턱을 넘었는지도 모른 채 이미 저편에 가 있다. 굉음이 잦아들고 새소리가 스며들며 화면이 열리면, 햇빛 아래 한가로운 강가의 풍경이 나타난다. 그러나 누구도 그 풍경을 더 이상 순진하게 볼 수 없다.
잘 만든 오프닝 시퀀스 안에서 시간은 평소처럼 흐르지 않는다. 시계가 재는 기계적 시간, 균등하게 토막 나서 앞으로만 가는 시간이 잠시 무력해지고, 늘어나거나 두꺼워지는 다른 시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Film still from The Zone of Interest (2023)
오프닝 시퀀스는 공간에 비유하자면 긴 복도, 혹은 입구까지 이어지는 긴 계단 같은 장치다. 문을 열자마자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보다 나는 입구가 긴 공간이 좋다. 한 걸음마다 무언가가 하나씩 보이고, 멀리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익숙한 세계가 등 뒤에서 서서히 닫히는 동안 낯선 세계가 조금씩 열리는 곳. 오프닝 시퀀스가 없어도 영화는 시작할 수 있고, 복도나 계단이 없어도 공간에는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도착을 살짝 지연시키는 이 미묘한 긴장을 잘 설계한 영화나 공간이 나는 좀 더 품위 있다는 입장이다. "놀러 오세요"라고 말로 해도 되지만, 종이에 펜으로 정성 들여 초대의 말을 쓰고 밀랍을 녹여 인장을 찍은 초대장 같은 것이다.
물질 예술. 이렇게 불러도 되는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만드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물질이고, 물질은 관객 앞에 돌연 나타난다. 말이 필요 없는 아우라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가끔은 내 작업에도 오프닝 시퀀스나 긴 복도 같은 것이 있었으면 싶다. 정성 들인 초대장 같은 것이다.
흙과 지구의 순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딱히 의도하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생각보다 먼 길을 다니게 되었다. 2023년에는 아이슬란드의 화산 지대를 걸었다. 2025년에는 에트나의 분화구에 올랐고, 한국의 유일한 화산섬인 제주에서 흙을 채집했으며, 버나드 리치가 머물렀던 일본 온타 마을의 흙도 만졌다. 시칠리아의 고대도시 타오르미나에서는 처음으로 인공의 암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모든 기억과 사유가 서서히 흐려져 가는 게 아쉬웠다. 그 사이사이 여러 전시를 위해 쓴 짤막한 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충분히 닿지 못하는 것도 아쉬웠다. 그런 소박한 이유와, 내 작업의 오프닝 시퀀스 혹은 긴 복도 같은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엄청난 야심을 동시에 품고 이 뉴스레터를 발행해보고자 한다.
Iceland, 2023
8월의 한낮, 서울의 공기는 여전히 습하고 덥다. 여전히 에어컨 없이는 버틸 수 없어 그 아래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결국엔 이 글이 에트나 분화구의 퍼석한 공기를, 아이슬란드 검은 화산 지대에 흩날리던 푸른 풀 소리를, 제주의 붉은 흙의 색감을 전달할 수 있기를. 그렇게 정성 들인 초대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Letter from Matter는 2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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